가자! 선봉에 서서 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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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9(1581) 가쓰나리는 18세의 나이로 첫 전투를 경험했지만 아버지 다다시게로부터 의절당해 미즈노 가문을 뛰쳐나갔습니다. 그 뒤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해 규슈의 명망 높은 무장들을 두루 섬겼지만, 어느 경우도 오래 가지 못했고 자주 주군을 바꿨습니다.

그러다가 게이초 4(1599) 다다시게와 화해한 가쓰나리는 도쿠가와를 대대로 섬기는 지방영주로서 오가키성 공략과 오사카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특히 여름 전투 때는 가장 먼저 오사카성 사쿠라몬 문을 제압하는 등 크게 무용을 떨쳤습니다. 그 후 가쓰나리는 후쿠야마 번주로서 도시조성 사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만년에는 막부의 요청을 받아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장남 가쓰토시와 손자 가쓰사다를 데리고 규슈로 출진했습니다. 그때 가쓰나리는 75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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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삿사 나리마사
오케하자마의 싸움, 나가시노의 싸움 등에 종군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과 함께 오다 노부나가의 약진을 떠받쳤습니다.
가쓰나리가 규슈를 방랑하던 시절에 가장 먼저 섬겼던 무장입니다.

B:도쿠가와 이에야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 에도 막부를 열어 250년 이어진 태평성대의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가쓰나리를 종형제로 삼았고, 그 무용을 칭찬하여 평생 동안 맹우로 지냈습니다.

C:고니시 유키나가
사카이의 호상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덴쇼 16년(1588년) 히고 지방 남쪽 절반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삿사 나리마사의 할복 후에 가쓰나리가 섬긴 무장이며, 고니시의 영지 내에서 발생한 봉기군 진압 때 무공을 올렸습니다.

D:가토 기요마사
구마모토성 축성으로도 유명한 가토 기요마사는 시즈가타케 전투 7공신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가쓰나리가 규슈에서 섬긴 무장 중 한 사람이며, 후에 가쓰나리의 여동생이 기요마사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E: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간베에의 장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적군 쪽으로 변절해 공작을 펼친 결과 동군 승리에 공헌했습니다.
구로다는 가쓰나리가 규슈에서 마지막으로 섬긴 무장이었습니다. 오사카로 향하는 선상에서 문제가 발생해 가쓰나리는 구로다를 떠났습니다.

F: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주고쿠, 시코쿠, 규슈, 오다와라를 평정해 천하를 손에 쥐었습니다.
다다시게로부터 의절당한 가쓰나리를 등용해 셋쓰 지방 728석의 영지를 하사했습니다.

G:미야모토 무사시
이도류의 개조로 불리는 검호.
가쓰나리에게서 검술 비전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오사카 여름 전투 때 가쓰나리의 장남(가쓰토시)을 호위하기 위해 미즈노 진영에 참가했습니다.

H:다테 마사무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우에스기 세력과 격전을 벌인 뒤 60만석으로 센다이번 초대 번주가 되었습니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야마토구치 선봉으로 함께 싸웠지만 양 가문의 진군 타이밍이 맞지 않아 우군끼리 싸우는 지경까지 발전했습니다.

I:오다 노부나가
오케하자마의 싸움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꺾었습니다. 그 후 약진을 계속했지만 혼노지의 변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첫 전투에서 공을 세운 가쓰나리의 활약을 칭송하며 칼과 글을 보냈습니다.

J:방랑 시절
1584년(21세)-1600년(37세)
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뒤 여러 지방을 떠돌며 각지의 무장들을 모시거나 다시 방랑하기를 반복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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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창

창은 병졸들에 의한 집단전이 전투의 주류가 되는 가운데 찌르기나 물리치기 등 다용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고 다루기도 쉽다는 점에서 널리 보급된 무기입니다. 자루의 길이도 실내용 단창을 제외하면, 짧은 것이 7( 2m), 긴 것으로는신장공기(信長公記)” 3칸 반( 6.3m) 길이의 창까지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길이가 다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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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다다카쓰가 사용했던 창돈보기리

혼다 다다카쓰가 애용했던 창으로 알려져 있으며돈보기리라 불린다. 천하의 3대 명창 중 하나인 이 창은 다다카쓰의 무용과 더불어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자루의 모습도한칸후(藩翰譜)”에는 길이가 2( 6m)이며 나전으로 장식돼 있다고 나오고, “혼다 헤이하치로 다다카쓰 전기(本多平八郎忠勝傳)”에는 길이가 1 3( 4m)이며 검은 빛깔로 옻칠이 되어 있다고 나온다. 이 물건은 현존하는 본체 부분만 실제 사이즈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