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마사히로를 둘러싼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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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히로는 일본 역사상 유례가 없는 난국을 맞이해 신분을 너머 실력에 따라 많은 인물과 힘을 모아 그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개국에 부정적이었던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해안방어 정책의 고문으로 맞아들이고, 하급무사인 가쓰 가이슈의 능력을 간파해 중용하는 등 신진기예의 신풍을 일으켰습니다. 마사히로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정예 그룹이 개국을 주도하면서 일본의 미래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또한 페리는 당초 일본인을 야만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지만, 그의 총명한 모습을 보고 달리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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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하야시 후쿠사이 대학두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 학원장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마사히로는 그의 명민함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미국사절단의 응접 및 페리와의 교섭 때는 마사히로의 명으로 전권대사를 맡았습니다. 미일화친조약 조문의 서명은 후쿠사이를 필두로 하고 있습니다.

B:존 만지로
본명 나카하마 만지로. 고기잡이를 하던 중 표류하다가 미국 포경선에 구조된 뒤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심문 결과 겨우 사형을 면한 만지로를 마사히로가 막부로 불러들여 미국에 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C:다카시마 슈한
포술가 겸 서양식 병학자. 서양식 포술의 필요성을 절감해 막부에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죄도 없이 투옥되었지만 가에이 6년(1853년) 마사히로에 의해 사면되었습니다. 군사적 측면에서 일본 근대화에 공헌했습니다.

D:에가와 히데타쓰
덴포 12년(1841년) 다카시마 슈한에게서 서양식 포술을 배웠습니다. 대포 제작을 위해 니라야마 반사로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가에이 6년(1853년) 페리가 내항했을 때는 시나가와 포대 축조 책임자였습니다.

E:가쓰 가이슈
하급 관리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막부에 제출한 “해안방어 의견서”를 높이 평가한 마사히로에 의해 높은 지위까지 올랐습니다. 나가사키 해군전습소에 입문하거나 간린마루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등 해군 설립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F:요시다 쇼인
안세이 원년(1854년) 동행을 요구하며 흑선 승선을 획책하였으나 거절당했고, 무단 도항죄로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사형으로 죽게 되었지만, 유능한 인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마사히로에 의해 풀려났습니다. 이후에 쇼카손주쿠(사설학원)를 열었습니다.

G:도쿠가와 나리아키
미토번 9대 번주. 마사히로의 요청에 따라 해안방어 고문으로서 막부 정치에 종사했습니다. 마사히로와는 국방 및 에도 만을 포함한 해안방어에 관해 자주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H:마쓰다이라 슌가쿠
후쿠이번 16대 번주. 마사히로, 도쿠가와 나리아키 등과 함께 개국 및 국방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면서 깊이 교류했습니다. 또한 서양 열강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양학소 설치 및 군제 개혁 등과 같은 번정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I:시마즈 나리아키라
전임 번주 이후의 후계자 다툼에 마사히로가 개입함으로써 사쓰마번 번주가 되었습니다. 해외정세를 잘 아는 정보통이었습니다. 방적사업이나 증기기관 개발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중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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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남하정책의 일환으로 푸탸틴을 파견한
니콜라이 1세

K:푸탸틴(러시아)
전권대사로서 가에이 6년(1853년) 7월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안세이 원년(1855년) 12월 21일 러일화친조약을 체결해 사할린을 양국의 공유지로 정했습니다. 기함 디아나호가 침몰했지만 일본 조선공의 힘으로 헤다호를 건조했으며, 이후 무사히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L: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개항을 요구한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

M:제임스 스털링(영국)
영국 해군 대장.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전쟁(크림전쟁)을 하고 있었고, 대러시아 작전의 전선기지로 삼기 위해 하코다테 개항을 요구했습니다. 안세이 원년(1854년) 8월 23일 영일화친조약을 체결해 나가사키와 하코다테를 개항했습니다.

N:제임스 비들(미국)
미국 해군 사관. 고카 3년(1846년) 통상을 요구하며 우라가에 입국했지만 일본은 네덜란드 이외의 국가와는 무역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회답했습니다. 이 실패에 대해 철저히 조사한 후에 페리가 일본을 찾아오게 됩니다.

O:미국의 발전을 위해 일본을 압박한
필모어 대통령

P:매슈 페리(미국)
1852년 동인도 함대 사령장관에 취임. 가에이 6년(1853년) 6월 3일 대일 교섭을 위해 우라가에 내항하여 필모어 대통령의 국서를 전달했습니다. 이듬해인 안세이 원년(1854년) 2월 다시 일본을 방문해 동년 3월 3일 일본에서 처음으로 미국과의 정식 대외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