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야마 번주에 대하여
번주 미즈노 가문, 번주 마쓰다이라 가문, 번주 아베 가문
번주 재임 기간
1710년(호에이 7년)~1715년(쇼토쿠 5년)
생몰년
1658년(만지 원년)~1715년(쇼토쿠 5년)
1658년(만지 원년) 아베 가문 5대 가주로 무사시국에서 태어났다. 1710년(호에이 7년) 53세에 빈고국 후쿠야마에 입성하는데 이때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후쿠야마번 아베 가문의 역사가 시작된다.
입성 후에는 모든 마을에 녹봉의 수량, 호구수, 가축수, 목면 등의 상품 작물을 비롯하여 미즈노 가문 낭인의 거주 여부 등을 기록한 장부 제출을 명하였으며 싸움, 도난 등의 단속을 위한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35개 조항을 발포하는 등 영주 교체로 인한 동요를 잠재워 영내 장악에 힘썼다.
아베 가문 또한 미즈노와 마쓰다이라 가문처럼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을 섬기는 가신 가문이다.
번주 재임 기간
1715년(쇼토쿠 5년)~1748년(간엔 원년)
생몰년
1700년(겐로쿠 13년)~1769년(메이와 6년)
1715년(쇼토쿠 5년) 부친 마사쿠니의 사망과 함께 남겨진 영지 10만석을 약관 16세의 나이에 계승한다.
1745년(엔쿄 2년) 47세에 막부 직할지인 오사카성을 총괄하는 오사카조다이(성주를 대신하여 오사카성 관리)에 임명되는데 이로써 아베 가문이 명문 가신 가문으로 막부 최고 수뇌부에 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번주 재임 기간
1748년(간엔 원년)~1769년(메이와 6년)
생몰년
1724년(교호 9년)~1769년(메이와 6년)
1748년(간엔 원년) 25세에 10만석을 계승한 후, 막부 최고 수뇌부의 길을 걷기 시작해 1752년(호레키 2년) 29세에 소자반(관직명)에 보임된 이후 교토 쇼시다이, 로주 등, 에도와 교토에 거주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20년간의 번주 재임 기간 중 막부의 요직에 17년간 몸 담았다.
번주 재임 기간
1769년(메이와 6년)~1803년(교와 3년)
생몰년
1745년(엔쿄 2년)~1805년(분카 2년)
1769년(메이와 6년) 25세에 마사스케가 남긴 영지를 계승하였다. 번주 취임 후의 정책 과제는 전대 이래의 재정난 극복에 있었으나, 매년 대흉작을 겪고 있던 후쿠야마 지방은 계승 이듬해인 1770년(메이와 7년) 농민 폭동이 일어나게 된다. 게다가 1786년(덴메이 6년) 말부터 다음 해 1787년(덴메이 7년)에 걸쳐 또다시 덴메이 농민 폭동이 일어나는 등, 마사토모는 불과 재임 11개월 만에 로주를 사임하고 그 후 본격적인 번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번주 재임 기간
1803년(교와 3년)~1826년(분세이 9년)
생몰년
1774년(안에이 3년)~1826년(분세이 9년)
1803년(교와 3년) 30세라는 장년의 나이에 가계를 계승한다. 마사키요의 정책에 대한 기본방침은 선대 마사토모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 즉 번의 재정 재건에 중점을 두었으며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농촌 대책을 꼽을 수 있다. 1805년(분카 2년) 후추시의 사창과 후카쓰군의 보강과 함께 호농 및 상층상인의 농촌 황폐 구제를 위한 전번적 기관인 후쿠야마번 의창을 설립하였다.
번주 재임 기간
1826년(분세이 9년)~1836년(덴포 7년)
생몰년
1809년(분카 6년)~1870년(메이지 3년)
1826년(분세이 9년) 18세에 부친 마사키요로부터 가계를 계승하나, 계승 후 수년간은 대홍수 등의 천재이변으로 재정 상황은 궁핍 상태에 급락해 버린다. 원래부터 병약하던 마사야스는 1836년(덴포 7년) 동생 마사히로에게 가계를 물려준다. 후쿠야마번 아베 가문 중에서도 비교적 장수한 인물로 1870년(메이지 3년) 61세로 사망한다.
번주 재임 기간
1836년(덴포 7년)~1857년(안세이 4년)
생몰년
1819년(분세이 2년)~1857년(안세이 4년)
마사키요의 6번째 아들로 1819년(분세이 2년) 에도에 있는 번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1836년(덴포 7년) 번주인 형 마사야스의 호주 승계인이 되어 같은 해 종5위하 이세노카미(관직명)에 임명, 이어 마사야스의 치사에 의해 18세에 가계를 계승했다.
1837년(덴포 8년) 후쿠야마에 귀국하나, 불과 2개월 남짓 체제하고 에도로 돌아가 소샤반, 1840년(덴포 11년)에는 지샤부교를 겸임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낸다. 나아가 1843년(덴포 14년)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로주로 발탁되어 종4위하, 다음 해 1844년(덴포 15년)에는 로주의 수좌가 되었다.
1853년(가에이 6년) 페리가 우라가에 내항하고 다음 해 1854년(안세이 원년) 미일화친조약 체결에 이르는 등 로주의 수좌로서 개국 문제를 지휘하였다.
마사히로는 그 후도 영국·러시아·네덜란드 3개국과 화친조약, 시모다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1857년(안세이 4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로주의 좌에 역임한 채 사망하였으니 최후까지 일본의 정치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제국들이 구미 열강과 전쟁, 혹은 식민지로 되어가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여 외국과의 정세를 감안한 뒤, 평화적으로 개국을 추진한 점은 크게 평가된다. 또한 도쿠가와 나리아키,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시마즈 나리아키라 등 출신 성분(신판, 후다이, 도자마)의 벽을 넘어 연계를 취하고 중론을 채택해 막부 정치와 외교에 임할 뿐 아니라 다카시마 슈한, 가와지 도시아키라, 가쓰 가이슈로 대표되는,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인재를 등용하여 막부 정치에서는 보기 드문 청신의 기풍을 일으켰다.
또한 문무일체 교육을 추진하여 에도와 후쿠야마에 세이시관 학교를 설립하는데 에도는 1854년(가에이 7년)에, 후쿠야마는 1855년(안세이 2년)에 개교하였다. “우선 우리 번이 앞장서 문무에 힘쓰기” 위해서는 “우선 학제를 개혁해야” 한다며 번의 무사 신분이 아닌 실력에 따라 발탁하는 등 인재 양성과 등용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번주 재임 기간
1857년(안세이 4년)~1861년(분큐 원년)
생몰년
1839년(덴포 10년)~1861년(분큐 원년)
1857년(안세이 4년) 19세에 마사히로가 남긴 영지 11만석을 계승하였다.
마사히로의 의지를 이어 무사들에게 문무를 장려하고 해안 방어를 위해, 이 또한 마사히로가 계획한 서양식 함선의 건조를 발의하는 등, 번정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61년(분큐 원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통치는 불과 3년이었다.
번주 재임 기간
1861년(분큐 원년)~1868년(게이오 4년)
생몰년
1848년(가에이 원년)~1867년(게이오 3년)
1861년(분큐 원년) 번주인 형 마사노리의 상속인이 되어 같은 해 14세에 마사노리가 남긴 영지 약 11만석을 계승하였다. 1864년(겐지 원년) 이후, 불과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후쿠야마번 병사를 이끌고 제1차 및 제2차 조슈 전쟁에 출진하는데 이시미국에 출진한 제2차 전쟁에서 오무라 마스지로가 이끄는 조슈군과 교전하나 1866년(게이오 2년) 병을 얻어 귀성한다. 1867년(게이오 3년) 불과 21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며 그 격동의 일생을 마친다.
번주 재임 기간
1868년(게이오 4년)~1869년(메이지 2년)
생몰년
1851년(가에이 4년)~1914년(다이쇼 3년)
전대 번주인 마사카타의 불의의 죽음 후, 번주 부재의 후쿠야마번은 1868년(게이오 4년) 히로시마 번주 아사노 나가코토의 동생 모토지로를 마사카타의 양자로 삼음과 동시에 마사히로의 여섯째 딸 히사코의 데릴사위로 맞이한다. 이로써 후쿠야마번 아베 가문 10대 번주는, 기이하게도 후쿠야마번에 있어 마지막 번주로서 영지 약 11만석을 계승하였다. 1869년(메이지 2년) 후쿠야마 번주는 신정부에 “판적봉환(번의 토지와 영지민을 천황에게 반납)”을 간언하고 번주였던 마사타케는 지번사로 임명되어 번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어서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번을 폐지하고 부와 현으로 일원화하는 행정개혁)”이 단행되자 후쿠야마번은 후쿠야마현이 되며 마사타케는 지번사에서 파면, 도쿄로 옮겨 살게 된다.